1987년 1월, 경찰 조사를 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이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박처장(김윤석)의 주도 하에 경찰은 시신 화장을 요청하지만,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검사(하정우)는 이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거짓 발표를 이어가는 경찰. 그러나 현장에 남은 흔적들과 부검 소견은 고문에 의한 사망을 가리키고, 사건을 취재하던 윤기자(이희준)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를 보도한다. 이에 박처장은 조반장(박희순)등 형사 둘만 구속시키며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 한편, 교도소에 수감된 조반장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이 사실을 수배 중인 재야인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조카인 연희(김태리)에게 위험한 부탁을 하게 되는데… 한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
감독 장준환
출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휘순, 이희준
영화 1987을 보고나니 역사적 사건을 미리 알았더라면 영화를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늦게나마 영화속에 등장했던 사건들을 찾아보니 영화의 줄거리를 다시 한번 훑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세대이다 보니 교과서에서 얉게 지나가는 부분이라 어렴풋이 들어본 듯한 사건들 뿐입니다.
저처럼 근현대사를 세세히 알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알게된 1987 속의 역사적 사건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알고보면 더 재미있는 영화속 키워드 시작합니다.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일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남영동 대공분실(南營洞對共分室)은 대한민국 경찰청 산하의 대공 수사 기관이었다. 1976년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었다가 경찰의 과거사 청산 사업의 일환으로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로 역할을 바꾸어 운영중이다.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이 군사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고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고 선언한 조치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5년 2 · 12 총선 이후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 결여, 비민주성이 지탄을 받으며 야당과 재야세력을 중심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중점으로 하는 개헌 논의가 점점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특별담화를 통해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4 · 13 호헌조치이다.
전두환은 4 · 13 호헌조치를 통해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및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하고 1988년 2월에 정부를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지 않고 기존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호헌 조치의 내용에 국민들은 더욱 실망했으며 각지에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1987년 6월 10일에는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6 · 10 국민대회> 및 <6 · 26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 등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리면서 6 · 10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자 전두환 정권도 어쩔 수 없이 이에 굴복해 4 · 13호헌조치를 철회하고, 6월 29일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6 · 29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직선제 개헌안을 수락하였다.
보도지침
제5공화국 시절 정부가 언론통제를 위해 각 언론사에 시달하던 지침.
체육관선거
‘4‧13 호헌조치’가 있은 1987년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의 임기 마지막 해였다. 당시 국민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군사정권을 또다시 연장하려 하자 거세게 저항하며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
정식 명칭은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며, 약칭은 정의구현사제단이다. 일정한 조직의 틀을 갖지 않기 때문에 흔히 '비정형 조직', '조직과 비조직의 절묘한 결합'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74년 7월 23일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한 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자 젊은 가톨릭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9월 26일 강원도 원주에서 결성했다. 단체의 목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사제의 양심에 입각해 교회 안에서는 복음화운동, 사회에서는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제1ㆍ2 시국선언에 이어 사회정의 실천선언(1974. 11)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또, 민청학련 사건, 민주회복 국민운동, 김지하 구명운동, 인혁당(人革黨)사건의 진상 조사, 자유언론 실천운동에 간여했다. 특히 1987년 5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제단의 주요 사업에는 민족의 평화통일과 국가보안법 폐지운동, 생명평화운동, 북녘동포 돕기운동, 반전 평화운동 등이 있다.
백골단
백골단(사복경찰 체포조 최근 경찰관기동대)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사복경찰관으로 구성된 시위 진압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부대를 일컫는 별칭이다. 1985년 8월 1일 서울시장 명의로 모집된 사복체포조는 대부분 무술 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이 특채되어 주류로 구성되었으며,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이 흰색 헬멧에 일반 전투경찰들과 구분되는 청색자켓 복장 때문에 백골단이란 별칭이 붙게 되었다.
이한열 열사 사망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1천 여 명의 학생이 대 정부 시위를 벌이던 중 이 학교의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국민들에게 더욱 깊은 불신감을 주었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어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이는 등 이른바 6월항쟁이 정점에 이르게 되자, 전두환 정권은 시국 수습을 위해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盧泰愚)로 하여금 대통령 선거의 직선제 개헌을 발표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6·29선언이다.
넥타이부대
일반적으로 화이트칼라 직종인 사무직에 종사하는 30∼40대의 중산층 노동자를 이르는 말이다. 사무직 종사자들은 보통 말쑥한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복장으로 사무실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이들을 넥타이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반적 의미 이외에 국내에서 넥타이부대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형성된 것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거리 행진을 하는 30대 남성들의 무리를 한 일간지 기자가 넥타이부대로 표현하면서 부터다.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던 이른바 민주화 3050세대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곤 한다.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시위.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시위 도중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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